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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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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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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찰하는 것에는 보풀이 일었다 자주 스위치를 껐다 켰고 비누에는 균열이 생겼다 비나 내렸으면 그러나 햇빛이 부서져 내렸다 파이프는 계속 뼈 소리를 냈고 하늘에는 버짐이 피어나고 있었다 너는 비틀어진 선로였다 그러니 이탈할 것 여러 번 다짐을 했고 면벽했다 여분의 무게로 나무는 흔들리고 있었다 무언가 자주 간섭했고 그러나 그것이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출구가 전환되고 있었다 청과점 앞에는 아지랑이가 오래 정체했다 네 동공은 우주 같았고 그러나 빈 우주에서 나는 독백하는 배역을 맡았다 또 한편의 여름이 재생되었다 나는 일상을 적지 않았다

안태운 /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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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온전히 나를 잃어버리기 위해 걸어갔다 언덕이라 쓰고 그것을 믿으면 예상치 못한 언덕이 펼쳐졌다 그날도 언덕을 걷고 있었다 비교적 완만한 기울기 적당한 햇살 가호를 받고 있다는 기쁨 속에서 한참 걷다보니 음푹 파인 곳이 나타났다 고개를 들자 사방이 물웅덩이였다 나는 언덕의 기분을 살폈다 이렇게 많은 물웅덩이를 거느린 삶이라니 발이 푹푹 빠지는 여름이라니 무엇이 너를 이렇게 만든 거니 언덕은 울상을 하고서 얼마 전부터 흰토끼 한마리가 보이질 않는다 했다 그뒤론 계속 내리막이었다 감당할 수 없는 속도로 밤이 왔다 언덕은 자신에게 아직 토끼가 많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지만 고요 다음은 반드시 폭풍우라는 사실 여름은 모든 것을 불태우기 위해 존재하는 계절이라는 사실도 모르지 않았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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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절기
나는 통영에 가서야 뱃사람들은 바닷길을 외울 때 앞이 아니라 배가 지나온 뒤의 광경을 기억한다는 사실, 그리고 당신의 무릎이 아주 차갑다는 사실을 새로 알게 되었다 비린 것을 먹지 못하는 당신 손을 잡고 시장을 세 바퀴나 돌다보면 살 만해지는 삶을 견디지 못하는 내 습관이나 황도를 백도라고 말하는 당신의 착각도 조금 누그러들었다 우리는 매번 끝을 보고서야 서로의 편을 들어주었고 끝물과일들은 가난을 위로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입술부터 팔꿈치까지 과즙을 뚝뚝 흘리며 물복숭아를 먹는 당신, 나는 그 축농(蓄膿) 같은 장면을 넘기면서 우리가 같이 보낸 절기들을 줄줄 외워 보았다 - 박준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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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 사랑의 실험
우리는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쉽게 '유죄추정의 원칙'에 몸을 싣는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라는 속담은 유죄추정의 원칙이 대체로 옳다고 우리를 오도한다는 점에서 혐오스럽다.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인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대체로 복잡하게 나쁜 사람이라는 것을.(신형철, 『정확한 사랑의 실험』 - '필사적으로 무죄추정의 원칙 고수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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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좋은 일
“네가 힘들면 나에게 손을 내밀어. 내가 그 손을 잡을게.”그렇다. 나는 믿을 만한 손을, 사랑하고 사랑받고 사랑을 줄 줄 아는 손을, 결코 놓지 않는 꽉 잡은 손들을 긍정한다. 우리 인생은 짧으므로 감탄할 만한 것을 손에 쥐고 있어야 한다.정혜윤, 뜻밖의 좋은 일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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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독서
방 안을 살피는 일이잠자리를 들추는 일이 아니기를책을 살피는 일이 문장을 소독하는 일이아닌 것처럼 눈의 검은자가흰자위의 독백을 이해할 때꿈이 찾는 조용한 가치들 선명한 여름인데 우리찢긴 페이지처럼 갈피가 없어너는 말없이 울고 빗물에 젖은 새처럼 흐느끼고하마터면 내 눈에 쏟아질 것 같은 널 안고팔베개를 해주었지책을 보았는데, 꿈은커다란 구렁이를 목에 휘감고 자는 일이래그럼 무섭지 않아요?너와 나 우리 모두가 그런 거라면그렇지 않다고 나는 말해주었지용기가 난 듯, 너는 넘어진 책장을 일으켜 세운지난 밤 꿈 얘기를 했는데, 불길한 눈을 가진계집애를 보았다고 분명어려움이 닥칠 거라며, 그새 잠이 들고 말지만 아득하고 따스한 너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니?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네가 말하는 걸나는 분명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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